필리핀의 몰락,
신자유주의 시대 농업의 운명
필리핀은 한때 세계 벼 연구의 메카로 불리던 곳이다. 1960년대 이미 세계미작연구소를 설립했고 1980년 초부터 쌀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식량위기 속에서 필리핀은 세계 최대 쌀 수입국이 되었다. 쌀 부족으로 인한 폭동 속에서 정부는 쌀 공급을 안정화하는 데 필사적이다. 한 신문에 실린, 아우성치는 시민들을 향해 무장한 상태로 쌀을 배급하고 있는 군인들의 사진 한 장은 국제적인 식량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전 시기 필리핀을 지배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가 비난받지 않은 유일한 행동은 ‘농업 부문에 대한 정부의 투자’였다. 마르코스 정권은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비료와 종자, 보조금을 지급하고, 농민들에 대한 신용사업 계획을 시행하였으며, 관개시설과 도로 등 농촌지역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태풍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1973년에 쌀을 수입한 것을 제외하면, 정부는 꾸준히 쌀을 비축하였다. 14년간의 독재 후 마르코스가 물러났을 때, 양곡창고에는 90만 톤의 쌀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키노 민주정부가 새로이 들어서자, 세계은행과 IMF 등 국제 채권자들은 260억불 외채의 우선 면제를 요구했다. 정부는 외채 상환을 위해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 필리핀은 GDP의 8%에서 10%를 부채상환에 사용했다. 세출에서 이자 지급에 쓰는 비율도 1980년 7%에서 1994년 24%로 증가했다.
반면 농업에 대한 정부의 자금 지원은 50% 이상 떨어져, 농업 역량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곡물 생산량도 점차 낮아졌다. 결국 평균 쌀 생산량이 베트남과 태국보다도 낮은 1헥타르 당 2.8톤까지 떨어졌다. 즉 외채 상환에 눌려, 농업 부문에서 국가가 전면 퇴각한 것이다.
정부의 농업 지원 프로그램 축소에 이어, 1995년 WTO 가입으로 인해 무역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WTO는 회원국들에게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 수출에 대한 쿼터를 없애고, 수입물에 낮은 관세를 매길 것을 요구했다.
필리핀은 쌀 수입에 대해 일정정도의 쿼터가 허용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10년 동안 국내 소비량의 1~4%를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했다. 생산량이 현격하게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정부는 부족한 양보다 훨씬 많은 쌀을 수입하였다. 이윽고 수입량은 1995년 26만 3천 톤에서 1998년 210만 톤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 결과 쌀값은 하락했고, 생산량은 더욱 떨어졌다.
대부분 미국산으로 보조금을 지원받는 값싼 옥수수가 수입되면서, 필리핀의 옥수수 재배 농지는 1993년 310만 헥타르에서 2000년 250만 헥타르로 줄었다. 수입 농산물은 가금류, 양돈, 채소 산업까지 위태롭게 했다.
1994년, 세계은행의 지도를 받은 필리핀 정부 소속 경제학자들은 “전통 작물에서의 손실은 화훼와 아스파라거스, 브로콜리와 같은 새로운 ‘고부가 가치’ 작물의 수출 사업으로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매년 50만개의 농업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농업 고용률은 1994년 1,120만 명에서 2001년 1,080만으로 떨어졌다.
결국 IMF 구조조정과 WTO 무역자유화 조치로 양쪽 뺨을 얻어맞은 필리핀의 자급형 농업경제는 무너졌다. 필리핀의 한 관료는 “국제 무역 환경의 불공평함에 우리의 소농민들은 완패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0억의 목숨을 쥐어짜는
초국적 농기업들
UN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al Organization, FAO)가 2009년 초 발표한 ‘2008년 국제식량불안정 실태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인 식량위기 속에서 만성적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수는 2007년에만 7천 5백만 명이 증가하여 전체적으로 약 10억 명에 달한다.
여기서 가장 많은 증가율을 보이는 지역은 아시아와 사하라 아프리카 주변 지역이다.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4천 1백만 명이, 사하라 아프리카 주변 지역에서 2천 4백만 명이 증가했다. 이는 전체 증가율의 3/4을 웃도는 수치다.
2008년까지 식량위기가 지속되어 수십억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식량 공급을 장악하고 있는 초국적 농기업들만은 더 부유해졌다.
2007년, 세계 최대의 곡물거래기업인 카길의 수익률은 70% 올랐다. 2006년부터 따지면 157% 증가했다. 세계 2위 곡물거래기업 ADM의 수익은 침체된 미국 에탄올 시장에 엄청난 투자를 한 탓에 다소 줄었음에도, 2006년에 비하면 41% 증가했다.
2008년, 세계 최대의 야자유제조업체 중 하나인 윌마르 인터내셔널(Wilmar International)의 수익은 17억 89백 만 불이다. 2년 만에 6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2008년 1/4분기엔 상품 가격이 폭락했음에도 수익은 2006년 한해 동안 벌어들인 것보다 많았다. 세계 최고의 동물사료 기업이자 아시아 최대 농기업인 짜런 폭판(Charoen Pokphand, CP)역시 기록적인 한해를 보냈다. CP 그룹의 수익은 전년대비 2배로 증가해, 그해 누적이익은 145% 증가했다.
식량 위기의 최대 수혜자들은 농자재 공급업체이다. 종자나 농약, 비료, 기계에 이르기까지 독점권을 가진 그들은 농민들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낼 수 있었다. 2008년 이들의 수익률 상승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비료 회사가 그렇다. 카길이 지분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모자익(Mosaic)은 2008년도 세전수익1)이 430%나 치솟았다.
역시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식품 가공업자와 소매 판매업체들도 식량위기 속에서 이윤을 극대화했다. 2008년도 네슬레(Nestle)의 수익은 전년대비 59%, 유니레버(Unilever)는 38% 상승했다. 소매업체 중에서는 카지노(Casino)가 7.3%, 아홀드(Royal Ahold)가 12.2% 의 상승을 보았다. 세계 최대의 유통업체인 월마트(Wal-mart)의 1/4 분기 수익은 3천 8백만 불로, 다소 하락했지만 미국의 극심한 경기침체를 고려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08년 동안 세계 최대 곡물, 비료, 종자, 농약, 농기계 기업들이 벌어들인 수익 총액은 약 22,552,000,000 달러였다. 구제금융도 필요 없었던 산업 분야가 바로 농업이었다.

식량을 생산해 인류를 먹여살린 것은 각국의 소농들이었다. 기업농들은 이들의 기반을 파괴하고 있다.
돈이 있어 식량을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돈이 있다 해도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상당수 국가의 식량보유율 및 자급률이 불충분한 상태이다. 세계은행과 IMF는 자유무역을 촉진하는 농업 정책을 추진하면서 각국 정부에 공공 부문의 비축 곡물을 팔 것을 강요했다. 그 결과, 현재 전 세계적으로 비축된 식량의 양과 식량 수요 간의 차이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즉 수요 충족분 외에 비상사태를 위해 비축해 둘 수 있는 분량이 적다는 것이다. 이는 가격 상승과 더 큰 시장 변동성을 초래했다. 따라서 각국은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불안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둘째, 생산량의 감소다. 2005~07년의 악천후는 주요 곡물 생산지역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곡물 생산율은 2005년에 3.6%, 2006년에 6.9% 하락하고 2007년에야 회복되었다. 이미 곡물재고량이 낮은 수준에서 2년간의 생산 감소는 세계시장의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들이닥칠 기후변화에 따른 잠정적 영향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식량 위기에 대한 불안은 공포심으로 번지고 있다.
셋째, 국민의 세금으로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받는 기업농들이 소농을 제치고 전반 농업을 주도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거대 기업농들은 수출업자들이다. 그들은 수출용 식량의 생산율을 높이는 것만이 목적이다. 국내에 식량을 공급한 것은 소농과 그 가족들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농업 정책은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가격보장이나 신용 및 기술 지원, 결정적으로 농산물 공급 시장을 빼앗아갔다.
이제는 동네 시장에까지 값싼 수입산 식료품이 넘쳐난다. 결국 초국적 기업들이 대부분의 내수 시장을 점유하고 식량 가격을 통제하기에 다다른 것이다.
유일한 대안, “식량주권을 되찾아라!”
이러한 전 세계적 상황에 맞서서 우리가 도전해 볼만한 유일한 대안이 있다. ‘식량주권 운동’이 그것이다. 비아 깜페시나가 1996년 세계 식량 정상회의(World Food Summit, WFS)에 처음 제출한 ‘식량주권 운동’은 2007년 ‘닐레니 국제식량주권포럼’2)을 통해 전 세계적 운동으로 지금까지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1) 세금을 계산하기 전의 투자 수익
2) 전 세계 80여개 나라의 농민, 가족농, 어민, 원주민, 무토지 민중, 농업노동자, 이주노동자, 노동자, 목축인, 산림, 여성, 청년, 소비자, 환경, 시민단체들을 대표한 500여명이 참가한 ‘닐레니 포럼’은 식량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식량주권은 우리의 토지, 영토, 물, 종자, 가축, 생물의 다양성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권리가 식량 생산자와 소비자의 손에 있다는 점을 보증한다. 식량주권은 불평등과 탄압이 없는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차이의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